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제1기 (1337-1360) (문단 편집) === 네빌스 크로스 전투 (1346) === [[파일:FroissartFol97vBatNevilleCross.jpg |width=850]] >스코틀랜드인들은 매우 용감하고 강인하며 전쟁의 혹독함을 잘 견딘다. >이들은 잉글랜드를 약탈하고자 할 때, 밤낮으로 하루 20~24리그를 행군해서 그러한 전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종군 민간인들을 제외하면 모두 말을 타는 것이 확실하다. 기사들과 향사들은 크고 훌륭한 승용마를 타고, 나머지는 작은 조랑말을 탄다. >산악 지형 때문에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빵이나 와인도 운반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단히 검소하기 때문에 빵과 와인이 없어도 설익은 고기와 개울물만 먹으면서 오랫동안 잘 견딜 수 있다. 이들은 냄비나 솥을 사용하지 않고, 가축의 가죽을 벗긴 다음 그 안에 고기를 담아서 조리한다. 그리고 이들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각자 안장 받침 아래에 크고 납작한 돌을 하나씩 넣고 안장 뒤에 귀리를 가득 담은 자루를 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물품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군사작전 중 설익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위장이 상하고 기운이 빠지기 시작하면 귀리를 물에 반죽하고 불에 달군 돌 위에 얹어서 둥그런 비스킷을 만들어 먹으며 속을 다스린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두 말을 타고 있으며 수레나 다른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더 멀리 행군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잉글랜드에 침입해서 그 나라를 불태우고 파괴하며 전부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로 많은 소를 약탈한다. >이들에게는 3천 명의 중장병, 즉 철갑옷을 입고 크고 훌륭한 승용마나 준마를 탄 기사와 향사들과, 그 지방의 전통적인 무장을 갖추고 작은 조랑말을 탄 2만 명의 교활하고 용감한 병사들이 있다. 이 조랑말들은 묶어두거나 빗질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타고 다닐 일이 없을 때는 알아서 풀을 뜯도록 황무지나 들판에 풀어놓는다. >---- >장 르 벨의 연대기[* 20~24리그(리유)는 약 100~120km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네빌스 크로스 전투)] 잉글랜드군이 포츠머스에 집결한 1346년 6월부터 이미 필리프 6세가 서신을 보내서 절박한 어조로 도움을 간청했으나,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는 그동안 씹고 있었다. 그는 14년 전 더플린 무어와 할리돈 힐에서의 교훈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프랑스 왕의 요청을 무시하기에는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다. 게다가 에드워드 3세가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고 9월부터 수만 명의 병력을 소집해 칼레를 포위하게 되면서 잉글랜드 왕이 지휘하는 주력군에게 반격을 당할 가능성마저 사라졌다. 10월 7일 데이비드 왕은 결국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한다. 이미 8월부터 첩자들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북부 잉글랜드의 지휘관들은 미리 준비해둔 군대를 신속히 소집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잉글랜드군의 소집이 완료되었고, 10월 17일 새벽 더럼 남부를 약탈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전초부대 하나가 짙은 안개 속에서 행군 중이던 북부 잉글랜드 야전군과 갑자기 마주쳐 교전을 벌인 끝에 큰 피해를 입고 도망쳤다. 생존자들의 보고를 듣고 북부 잉글랜드 주력군이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된 데이비드 왕은 앵글로색슨 시대의 석조 십자가 때문에 네빌스크로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지대로 이동해 진을 쳤다. 곧 잉글랜드군이 도착했지만 양측 군대는 아침부터 오후 한낮까지 몇 시간 동안 서로 노려보며 대치만 하고 있었다. 결국 잉글랜드군 지휘관 랠프 네빌과 헨리 퍼시가 먼저 장궁병들을 보내서 스코틀랜드 전열에 사격을 퍼붓게 했다. 이에 데이비드 왕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서 지원받은 고품질의 갑옷을 입은 맨앳암즈들을 도보로 돌격시켰다. 하지만 목초지 곳곳에 널린 울타리와 도랑 때문에 대열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장애물을 피해 흩어진 채 화살비를 뚫고 간신히 잉글랜드군 전열에 도달한 맨앳암즈들은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에게 간단히 격퇴당했다. 경무장 승마보병 위주로 구성된 두 번째 대대는 선봉대가 패주하는 것을 보며 전의를 잃고 도망쳤다. 데이비드 왕의 대대는 고지대에 남아서 잉글랜드군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밤이 되자 후방에 묶어놓은 말을 타고 도망쳤다. 하지만 후퇴는 곧 무질서한 패주로 바뀌었고, 밤새 이어진 추격전에서 많은 패잔병들이 죽거나 붙잡혔으며 데이비드 왕도 결국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결과는 잉글랜드 군대의 대승이었다. 수많은 귀족 지휘관들을 비롯해 지난 십수년 간 치열한 게릴라전으로 발리올을 축출하고 잉글랜드 주둔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낸 스코틀랜드의 고참병들이 이 한 번의 전투로 몰살당하면서 잉글랜드는 브리튼섬 본토에서의 위협이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